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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분읽기/오분문학

[입 속의 검은 잎]_기형도_부끄러운 나와 함께 살아가기

이 시는 제목만으로도 시가 된다

 

이 시는 시보다 제목에 모든 게 담겨 있다

제목이 시이고

시는 제목을 설명하는 텍스트같다

 

기형도 시인을 처음으로 소개받은 건 대학교 2학년때였다

책을 읽지 않는 우리 동기들을 걱정하는 패기 넘치던 강사 한 분이 우리들에게 시 읽기를 추천하며 이 시를 읽어주었다

 

날씨가 좋은 봄날 공부하기 싫었던 우리가 우겨서

바깥 잔디에서 놀기 삼아 시작된 수업이었다

 

우리는 강사에게 주로 강의와 상관없는 사적인 질문들을 했다

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느냐

애기는 있는가

유학시절 이야기를 해 달라

등등

싫어하는 기색 별로 없이

우리 질문에 짤막짤막 대답해 주셨다

 

그리고는

공부하기 싫어하는 우리에게 대학시절에 책이라도 많이 읽어두라며

이 시를 읽어주었다

 

시를 잘 읽는 낭독 수준이 아니었으나

그날 날씨 탓이었을까

시를 듣고 있자니

대학에 와서 공부하기 싫어하고

삶을 허투루 대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

 

그러고 나서

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되는 시집을 많이 샀던 것 같다

그리고

나도 다른 이들에게 해 줄 뭔가 교훈적인 한마디가 필요할 때는

이 시를 읽어주거나 추천한다

 

첫 시집이 유고시집이 되었다는 것도

뭔가 우울하면서도 아름다운 말투도

시인 윤동주와 연결이 되는 듯하고

화가 반 고흐와도 연결이 되는 듯해서

요절한 천재처럼 느껴졌다

 

시평에 보면 리얼리즘이나 그로테스크 같은 거창한 말들이나 암울한 시대를 나타낸다고 적혀 있지만

이 시를 읽으면

그렇게 거창한 말로는 이 시를 설명하기 적합하지 않다고 느낄지도 모른

 

 

지은이: 기형도

출판사: 문학과지성사

출판일시: 2000년 6월 30일

입 속의 검은 잎

 본문 중에서

입 속의 검은 잎 -

 

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

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

(...)

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

 

시인 기형도

 

메모들 중에서

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.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.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.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.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.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.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.

 

-질투는 나의 힘 -

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

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

 

-빈집-

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

잘 있거라, 짧았던 밤들아

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

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, 잘 있거라

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

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

잘 있거라, 더 이상 내 것인 아닌 열망들아

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

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

 

 

심지어 외국인에게도 이 시를 추천해주곤 한다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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